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통행료 징수와 해상 봉쇄 위협에 맞서 홍해를 관통하는 1,200km 길이의 이른바 ‘에너지 만리장성’ 구축에 사활을 걸고 나섰다. 이는 지난 수십 년간 중동 원유 수출의 유일한 혈로였던 호르무즈 해협의 시대가 저물고, 육로 송유관을 중심으로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이 완전히 재편되는 역사적 전환점을 의미한다.
사우디는 현재 동부 유전지대와 홍해 연안 얀부항을 잇는 핵심 송유관 ‘페트로라인’을 풀가동하며 이란의 해상 통제를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의 뼈아픈 교훈으로 세워진 이 라인은 최근 수송량을 설계 한계치인 하루 700만 배럴까지 끌어올리며 사우디 경제의 새로운 생명선이 되었다. 사우디 정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유럽 및 서구권 시장과 직접 연결되는 추가 파이프라인 건설과 기존 노선 확장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파격적인 대목은 과거 앙숙 관계였던 이스라엘과의 ‘에너지 혈맹’ 기류가 포착되고 있다는 점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최근 사우디 얀부항과 이스라엘 지중해 연안 아슈켈톤항을 잇는 ‘지중해 에너지 라인’ 확장을 전격 제안하며 중동의 지정학적 지도를 새로 그리고 있다. 이 구상이 실현될 경우 중동 원유는 이란이 장악한 호르무즈 해협을 완벽히 우회해 지중해를 거쳐 서구권으로 직접 수송되는 혁명적인 공급망을 갖추게 되며, 이는 이란의 에너지 패권에 치명타가 될 전망이다.
아랍에미리트(UAE)와 이라크 역시 각자의 육로 생존법을 모색하며 주도권 경쟁에 가세하고 있다. UAE는 호르무즈 해협을 거치지 않고 오만만으로 직접 연결되는 아부다비 라인을 최대치로 가동 중이며, 이라크는 최대 30조 원 규모의 예산을 투입해 요르단 홍해 항구와 연결되는 대규모 파이프라인 신설을 검토하고 있다. 이러한 육로 인프라 확충은 이란이 내세운 ‘에너지 톨게이트’ 정책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한 산유국들의 공동 대응책이자 생존 전략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거대 프로젝트 앞에는 막대한 건설 비용과 복잡한 정치적 갈등이라는 높은 벽이 존재한다. 송유관 신설과 확장에 최소 수조 원에서 많게는 수십 조 원의 자금이 투입되어야 하며, 여러 국가의 국경을 통과하는 특성상 운영권과 통제권을 둘러싼 인접국 간의 마찰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이란의 해협 통제가 유럽과 일본 선박에까지 실질적인 위협이 되기 시작한 만큼, 육로 에너지 인프라 구축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고 분석한다.
에너지 안보 위협이 현실화되면서 국제 유가가 배럴당 140달러를 돌파하는 등 글로벌 경제는 이미 ‘오일 쇼크’의 공포에 휩싸여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공급망의 근본적인 재편이 향후 수십 년간 중동 정세와 세계 경제의 새로운 표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의 불확실성이 상수가 된 이상 중동의 에너지 권력은 이제 해상에서 육상으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으며, 우리 기업들도 이러한 지각변동에 따른 에너지 수급 전략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장호진 기자 (daegunewsdesk@gmail.com)
